[탈북자 수기] 자유북한방송 수기응모작

필자는 전 국가안전보위부 24국에서 외화벌이 담당 책임지도원으로 근무하다가 김정일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2004년 자유를 찾아 탈북 하였다. 자유와 민주,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남한에 와서 필자의 탈북 결심이 백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2 행복과 불행의 시작

90년대 중반이어서 경제난과 식량난이 혹심하여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 죽어나가는 때어서 당시의 최고의 인기직업으로서는 외화벌이였다. 그래서 나는 국가안전보위부산하인 신흥무역회사가 아니면 외화벌이 담당국인 24국으로 전근을 하기로 했다.

마침 24국에 수출입 책임지도원이 철직되어 자리가 비었다. 정치부장의 부인은 넌지시 나에게 그 자리로 갈 의향이 있는 가고 물었다. 나는 얼른 동의하였고 다음날 소좌로의 승진과 함께 전근 명령서가 떨어졌다. 북한에서 상위에서 소좌로 두 계급을 단번에 뛰어 넘는 것은 흔치 않은 승진이었다.

나의 인생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24국에 배치되어 처음 담당한 일이 서부지구 외화벌이 기지들을 담당 관리하는 것 이였다. 나에게 “평양 18-×××” 이라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차번호를 단 일제 고급승용차가 배정되었다. 나에 대한 정치위원의 ‘배려’였다.

그 때부터 나는 무역일군이 되었다. 첫 시작을 현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외화벌이 기지장들에게 나의 취임을 알리고 그들의 사업을 일일이 검열을 하기위해서이다. 기지장들은 정식 정복을 입은 보위원이 아니고 사복편제로서 능력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을 노무자형식으로 채용하여 기지장이라는 간판을 준 것이다.

때문에 나의 한마디에 따라 기지장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어서 나에게 잘 보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지표에 따른 외화벌이 계획을 수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찬 일이다.

매 단위들에서 항상 계획미달로 상급의 불같은 추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기지장들의 생활은 범 없는 골 안에서 삵이 왕 노릇 한다고 벌어들인 돈으로 흥청거리며 살고 있었다. 내가 현지에 내려가기 전 그들은 벌써 나의 경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전의 책임지도원들은 가정생활이 말이 아니어서 기지장들의 비리를 보고도 뇌물을 찔러 주면 눈을 감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앞의 책임지도원도 결국은 뇌물수수에 걸려 해임철직된 것이다.

그러니 나의 생활이 부유하다는 것을 안 기지장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정생활이 어려워야 뇌물이 먹히겠는데 그렇지가 않으니 언제 저들의 목이 달아날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공정하게 검열조사를 하였다. 조사결과는 너무도 한심했다. 연간 계획은 일인당 2000달러, 종업원 수에 따라 계획을 하자면 5명이 있는 기지에서는 1만 달러를 벌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보위부에서 돈이나 물자를 대주는 것도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국가안전보위부라는 허울 좋은 간판의 신분증과 국가안전보위부의 차번호가 전부였다. 하긴 권력이 판을 치는 북한에서 이런 조건이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탈북자 오상민 (2006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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