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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 움직이면 쏜다!”

차디찬 총구가 내 등에 와 닿았다.

영화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보고 상상했던 시커먼 총구가 당장이라도 심장을 뚫을 수 있는 실탄을 채운 자동보총이 나를 겨누고 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고 다리의 맥이 저절로 풀리면서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앞은 캄캄해지고 머릿속은 온통 “배신자, 반역자, 총살, 정치범수용소”하는 무서운 단어가 꽉 차버린다.

무슨 유혹에 빠져 정신없이 이 길을 떠났는지 한순간 때늦은 후회가 감돈다.

거의 40여일을 머물며 ‘왜가리’짓을 하는 우리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름도 모를 고마운 동네사람이 산 정상에서 올라와 강 건너 중국 동네를 가리키며 친절하게 찾아 갈 집을 알려주고 돌아간 후로도 몇 시간이 잘 흘렀다.

분명 올라 올 때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음지가 되어서인지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미로였다.

아니, 아예 사람이 다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동네 사람을 따라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더 이상 반겨줄 사람도 없고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죽거나 살거나 한길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말이 내리는 것이지 굴러 떨어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데굴데굴 굴러 내리다가 나뭇가지라고 잡으면 마른 삭정이처럼 뚝뚝 소리 내며 부서졌다.

그래도 나는 굴러 내리다가 멈추는 순간이라도 있다만 세월에 어울리지 않게 뚱뚱보인 그 여자는 부딪칠 곳도 없이 무작정 한참씩 굴러 내렸다.

“어디 있어요?”

조심스럽게 서너 번 부르면 어디선가 가느다란 모기소리 같은 게 들려온다.

한길 넘게 내린 눈이 다행이도 두 사람을 숨겨주는가 싶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눈 속을 뒹굴다보니 장갑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손이 감각이 없어지고 발엔 신발이 신겨져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야만 알 수 있다. 게다가 노루꼬리처럼 짧은 한 겨울의 해는 벌써 사라질 시간인지 서쪽 하늘 한 켠에 다리만 걸치고 있다.

살겠다고 나선 이 길에서 귀신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내려가기를 포기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올라갈 길도 아득한 천리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돌아 설 생각까지는 없었다. 죽어도 가야 할 길이어서 택했고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어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결심한 길이다. 브로커를 따라가면 안전하게 갈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상황이 안 되어서 선택한 길이다.

중국으로 돈벌이를 갔다는 주인집 여자는 4명의 어린애들을 남겨두고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서너 달에 한번 씩은 왔다 갔다 해서 지금쯤은 돌아올 때도 되었다는 데 도무지 오질 않는다. 하긴 안면일식도 없는 주인집 여자다.

다만 한번 주인집 여자의 신세를 졌다는 영희네 엄마가 소개해 준 손바닥만 한 종잇장 하나를 달랑 들고 그 여자를 기다렸다.

집주인은 남자 혼자서 오롱조롱한 애들 4명을 매일 밥 해먹이고 빨래 해가며 거기다가 돼지까지 키우기에 지쳐있던 차라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맞아주었지만 중국 연변에 사는 이모를 만나기 위해 왔다는 말과 ‘소개장’을 보고서는 아예 살림을 맡겨버렸다.

다행이었다. 기나긴 12일간의 기차 여행에 영희네 엄마가 챙겨준 여비까지 다 쓰고 빈 몸이기에 나가라고 해도 살려주십사 하고 빌붙을 처지였기에 언감생심 너무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 도시와 많이 떨어진 동네에서 자라 온 애들은 착하고 순진했다. 두 살 터울로 제일 큰 애가 14살이고 이렇게 위로는 딸 3명이고 막내가 남자앤데 말도 잘 듣고 반찬도 투정 없이 주는 대로 잘도 먹었다.

애들을 밥 먹여 학교 보내고 돼지 밥 주고 동네에 몇 개밖에 안 되는 집안에 펌프가 있는 집이라 물 길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외지에서 온 ‘왜가리’들과 수다 한참 떨고...

그러다보면 드문히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도강 할 사람이 없는 지 탐문 한다. 희한한 광경이다.

하긴 여기 와서 처음 듣는 언어가 많았다.

집주인이 녹음기를 틀어놓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물어보니 중국 연변 노래라고 했다.(후에 알고 보니 한국의 트로트였다.)

도강이요, 브로커요 이런 말도 고향에서는 전혀 못 들어 본 생소한 말이다.

애까지 데리고 가면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아니 되고 강을 건너가서 친척을 만나고 돌아오겠다면 돌아 올 시간까지 약속하고 보낸다니 여긴 확실히 딴 세상이다.

제일 무서운 내부 고발자가 없어서 편했다.

하긴 너도나도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기에 그런지도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도 ‘왜가리’들도 서로를 동정하고 함께 갈 길을 의논했다.

좀 더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 전문적으로 그 일을 맡아한다는 브로커도 소개해주고 돈도 사이좋게 함께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느 군인이 언제 어디서 근무를 서는데 언제 돌아오면 된다고 친절하게 스케줄 관리까지 해준다.

문제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강 넘기를 제집 드나들듯이 했다니까 벌써 10년이 가까워 온다.

고향에서는 국경지역의 이런 사정엔 전혀 깜깜이고 친척의 도움은 커녕 혹여 편지라도 올까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래서 앉아있는 똑똑이보다 돌아다니는 머저리가 더 낫다는 말이 생겼나 싶을 정도다.

하긴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이야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이 동넨 확실히 딴 세상이다.

고향에서는 옥수수 국수죽이란 게 등장했는데 그래도 이 동네선 웬만한 집이면 강냉이밥이라도 밥을 먹으니 시내가 뭐 부러울까?!

시내 장마당에선 기껏해야 밀가루 빵이 고급인데 여기선 똑같은 값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나온 이름마저 낯선 고급빵만 먹는단다.

시내에서는 중국에 들여간다고 비싼 낙지나 명태가 오히려 바다 먼 여기가 더 싸니 뭐라 해야 할까.

암튼 희한한 여러 가지 일들을 목격하며 그럭저럭 한 달을 넘겼다.

근데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집 양반의 기색이 편치 않아 보인다. 아줌마가 제 기일을 지켜오지 않아 불편한지, 아니면 낯도 모를 낯선 여자가 한 달을 공짜밥을 축낸다고 생각해서인지 암튼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주인집 남자가 대낮에 술을 거나하게 퍼 마시고 밖으로 나가 “여기에 중국으로 도망치려는 여자가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뻔한 나는 신도 못 신고 그 사이 안면을 익힌 해주아줌마의 집으로 급히 피신했다.

사실 주인집 아줌마를 애타게 기다린 건 남편보다 나였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오라는 사람은 오지를 않는데 엄마 품에서처럼 편히 잠든 막내를 내려다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잠 못 이룬 밤이 얼만데…….

하긴 이 동네에 온지도 40일이 되어간다.

도강을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간다고 반겨 줄 사람도 없고 또 돈도 한 푼도 없는 몸에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서 잘못 될지 불 보듯 뻔했다.

죽어도 넘어가다가 죽든지 시도라도 해봐야 할 판국이다.

마침 나처럼 너무 오래 기다린 또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알고 보니 한 고향 사람이었다.

강 건너 보이는 바로 앞 동네에 그 여자의 사촌이 살고 있단다. 작년인가 한번 건너갔다 온 경험도 있다 한다.

그뿐인가?! 내가 이모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직장과 이름만 알고 있다고 하니까 자기 사촌만 만나면 도움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브로커의 도움도 없이 겁도 없이 이 길을 택한 데는 고향 아줌마의 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너무 절망적이다 보니 내가 미친 것 같다.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간 큰 일을 벌였는데 이미 늦었다.

산 중턱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줌마를 찾고 있다 보니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저기 아래로 ‘왜가리’들이 서있던 자리가 보인다.

바로 눈앞에 손 잡힐 듯이 ‘개산툰’이란 동네도 빤히 바라보인다.

강 건너 동네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왜가리’도 보인다.

함경북도에 오니 희한한 말들이 많다.

배낭을 메고 식량구입을 가는 걸 두고 함남도 사람들은 ‘식량공작’을 간다고 하는데 함북도 사람들은 ‘행방’을 간다고들 했다. 한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라는데 처음 들었을 때에는 웃겨 죽을 뻔 했다.

시대를 풍자해 생겨난 신조어는 이 뿐이 아니다. ‘꽃제비’ 제비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한 의미는 거지다. 그러고 보니 시내엔 흔한 꽃제비가 이 동네엔 없다. 대신 이 동네 애들은 도강을 해서 연변쪽 호텔 앞에 가서 남조선 사람들한테 가서 동냥을 해서 큰 몫을 챙긴단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으면 은근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시내사람들이 잘 살 땐 분명히 도시의 문명과는 떨어진 농촌이었는데 지금은 영 딴 판이 되었다.

그전에는 미역을 감으려 두만강에 뛰어들어도 군인들조차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다. 돈을 주고서라도 넘어가려는 사람과 돈을 받으면 눈감아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나처럼 한 푼도 없이 브로커에게 운명을 맡긴 사람도 많다. 그런데 운명까지 맡기고 기다리는 주인집 여자가 돌아오지 않고 이 상황까지 되다보니 내가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재수 없을 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나?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잘못되면 코가 깨어지는 것쯤은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떠났는데 그만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함께 떠났던 아줌마 때문이었다.

함경북도 쪽엔 유난히 철길 옆으로 경사가 급한 곳도 많고 차굴도 많아 감시초소도 많은 데 아줌마가 철길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추워서 감시초소에 들어 가있던 두 군인이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가만 우리를 뒤쫓아 강을 넘었던 것이다.


봄, 여름, 가을엔 중국 쪽에도 들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국경침범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군인들이 두만강을 넘지 못하지만 겨울이라 사람도 없고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한명은 강뚝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고 총을 멘 군인 한명만 우리를 뒤쫓아 왔다.

짐승과 같은 소리를 지르던 고향아줌마도 붙잡혔다.

결국 그렇게도 가고 싶던 중국 땅에서 북한 군인들에게 잡혔다.

얼마나 급했는지 신 한 짝을 잃은 것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도 좁은 동네라 어둠속에서도 총 든 군인들에게 끌려오는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부끄럼보다도 더 큰 걱정과 고민은 앞에 있다.

조국을 배반한 자에게 차례지는 엄벌이 무엇인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한 외조부를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나라의 ‘은혜’를 바랄 수 없다.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국경경비대 초소로 끌려왔다.

이모를 만나면 인증문서로 내놓으려고 했던 사진 몇 장도 다 빼앗겼다.

막내 동생 나이나 되었을까 파랗게 젊은 경비소대장은 어깨까지 으쓱이며 ‘공로’를 세운 군인들을 치하하고 우리를 향해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말 절반, 쌍욕 절반으로 필요한 문건을 작성한 뒤 우리는 한밤중에 분주소로 넘겨졌다.

무릎을 끓고 앉아 뾰족한 구둣발로 사정없이 채일 때 비로소 나는 군인들한테서 받은 ‘대접’은 과분한 ‘접대’였다는 걸 실감했다.

그날부터 3일은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문풍지도 하지 않고 밖이나 다름없는 차디찬 방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분주소로 온 지도 이틀이 지났다.

내일 밤만 지새면 온성 집결소로 이송된다는 걸 안다.

돈이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지인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는 타지에서 나는 요행을 바랄 수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오직 재판 받고 감옥에 가기 전까지 벌어 질 일들을 나름대로 상상하느라 손발이 얼어드는 것도 잠깐 잠깐 잊고 있었다.

이 날이 바로 1999년 1월 6일이다.

집결소로 이송되기로 한 날인 1월 8일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6명이 함께 극적인 탈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길고 긴 시간동안 위와 같은 ‘탈출’과정의 반복 속에 또다시 극적으로 한국행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이렇듯 북한을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건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다.

오늘 현재도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어딘가에 숨어서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의 성공을 기원한다.

2011년 5월 이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