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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은 왜 숙청되었을까? 대내외 언론은 주로 여러 가지 개별 사건 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수산사업소 관할권을 둘러싼 충돌, 장성택의 삐딱한 태도, 장성택의 방탕한 생활 등이다.

이 글은 장성택의 득세, 실각과 처형의 배경에는 김정은 권력세습에서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던 두 세력 간의 대결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김정은 권력세습 과정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한 두 세력은 누구인가? 그리고 두 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거기서 김정일과 김정은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이 글이 제시하는 것은 가설적 판단이다. 이 글의 가설적 판단은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기존의 공개첩보, 그리고 여러 판단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에 바탕하여 작성되었다. 글의 성격상 각주는 달지 않는다.

 

김정은 권력세습 추진에서 두 세력 간의 주도권 경쟁

 

1990년대 선군정치 하에서 군부의 영향력 증대는 김정일에게 이중적 의미를 가졌다. 한편에서 김정일은 군부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권력보

존에 활용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김정일은 군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증대하는 것을 우려했다.

 

김정일의 우려가 가시화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 권력세습 문제 대두였다. 2002년부터 군부가 주도하는 가운데 고영희-군부-조직지도부(이제강이용철) 연합이 세습 후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김정일은 이 시기 후계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김정일은 후계 논의 시작이 자신의 권력을 급격히 위축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둘째,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군부가 후계 문제에서까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군부가 권력 세습의 주도권을 잡으면, 그 후계자는 군부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 이 많았을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을 견제할 권력 게임에 시동을 걸었다. 김정일은  먼저 장성택, 그리고 뒤이어 김경희에게 힘을 실어주어, 군부-조직지도부의 견제 세력으로 키웠다.

 

김정일은 2005/2006년부터 장성택을 내세웠고, 2008/2009년 이후에는 그 동안 사실상 은둔하고 있었던 김경희도 전면에 내세웠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로부터 행정부를 분리해 장성택이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조직지도부를 견제했다.

김정일은 또한 장성택에게 군부의 무역권을 축소하고 구조조정하는 역할을 맡겼다.

김정일은 그 과정에서 장성택이 자기 자신의 이권을 팽창시키는 것을 묵인했다.

 

2009년부터 선군시대 군부의 주요 인물이 점진적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던 것, 2009년과 2010년 장성택과 오극렬 사이의 이권 다툼에서 장성택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정일의 의중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김정일이 김경희-장성택 연합이 2009년 이후 김정은 후계 체제 수립에서 주도권을 갖도록 지원한 것이었다. 이는 하나의 반전이었다.

 

고영희의 아들로 권력세습을 추진하려고 먼저 시작했던 것은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김경희-장성택은 김정남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장성택 반대파의 발호

 

그런데 2011 12월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사정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표면상으로는 2012년까지도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주도권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사망은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가장 중요한 권력 원천이 소멸했음을 의미했다. 이에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반대파인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김정은도 반대파의 공세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2012년과 2013년 김경희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이는 김경희-장성택 연합의 한축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기회를 활용하여 반대파는 장성택과 그 일파를 본격적으로 공격했고 붕괴시켰다. 2013년 말 장성택 실각에는 이와 같은 상황 변화가 작용했다.

 

아래에서는 2011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부터 2013년 말에 이르는 시기에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이 힘을 결집하고 장성택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을 서술한다. 여기서는 시간 순서로 서술하면서, 장성택 반대세력이 점차로 공세를 강화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첫째, 이제강의 유고가 2011 12월에 출간되었다. 이제강의 유고 『혁명적 대오의 순결성을 강화

해 가시는 나날에』가 김정일 사망 직후인 2011 12월에 출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둘째, 고영희 우상화가 시작되었다. 2012 4월 미사일 발사 실패 직후인 5월에 북한은 『위대한 선군의 어머님』이라는 85분짜리 고영희에 대한 기록 영화를 최고위 간부들을 대상으로 상영했다.

그리고 고영희의 묘가 7월경 평양시내 대성산 부근에 설치되었다. 고영희는 2004 5월에 사망했는데, 그의 묘가 2012 7월에 평양에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셋째, 김정일 사망에 이어 장성택은 권력 보호막 하나를 더 상실했다. 2012 9월 김경희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 시점은 2012 7월 이영호의 해임, 군부 무역권의 본격적 축소 시도 등 때문에 군부의 불만이 커진 상태에서였다. 이 상태에서 김경희의 건강악화는 장성택이 고립무원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김경희-장성택 반대파에게 기회를 주었다. 2012 11월 이제강의 유작 『혁명적 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 가시는 나날에』가 조선중앙 TV에서 소개되었다.

 

넷째, 군부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그 징조는 2012년 말~2013년 초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먼저2012 11월 군부의 무역활동이 재개되었다. 이는 하나의 반전이었다. 군부의 무역권은 2012년 하반기에 대폭 축소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군부 무역 축소 정책의 주역이었다. 다음으로 군부가 주도하는 긴장고조 국면이 2012년 말부터 2013 4월까지 지속되었다. 장성택을 중심으로 김경희(노동당 제1비서)와 강석주(당시 당정치국 위원 겸 내각 부총리) 3차 핵실험에 반대했다고 한다. 반면, 최용해(총정치국장), 현영철(당시 총참모장), 김영철(정찰총국장)은 찬성하였다고 한다.

 

장성택은 개성공단 폐쇄에도 반대하였다 한다. 장성택의 반대파는 4월까지 대남 강경 긴장고조를

통해 내부 정치에서 기선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2013 5월부터 고영희와 이제강을 받드는 수준이 한 단계 더 높아지고, 오극렬과 조직지

도부의 역할이 강화되는 징후가 나타났다. 이는 장성택 반대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과 기관이 득세함을 의미했다. 김정은이 이에 동조했다는 증거도 나타난다.

 

이를 차례로 보자.

 

① 5월부터 이제강은따라 배우기대상으로 승격했다. 5월 김정은은 중요 간부회의에서 이제강의 충성을 회고했고, 이에 따라 노동당 중앙위는 당원과 간부들에게리제강 따라 배우기 운동을 호소했다고 한다.

2010 6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을 당시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않았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달라진 상황이었다.

 

이제강따라배우기가 등장하던 무렵 오극렬도 지위가 상승하여 재등장했다.

정치국 후보위원인 그는 5월과 7월 국가행사에 정치국원에 상당하는 지위로 등장했다.

 

③ 6유일영도체계 10대원칙이 선포되었다. 이는 조직지도부의 위상강화 신호이다. 김정은은 6 19일 노동당과 군, 내각 등의 고위간부를 모아놓고유일영도체계 10대원칙확립에 대해 직접 연설했다. 아울러 북한은 당원증도 새로 교부했다.

 

④ 8월에는 고영희 기록영화 상영이 일반 주민에까지 확대되었다. 주민들은 감상문을 써야 했다.

 

여섯째, 2013 9월 장성택 반대 세력은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 계기는 9월 김경희가 건

강 악화로 러시아로 출국한 것이었다. 9 9일 김정은 가족회의가 열렸다. 여기에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인 조연준, 그리고 김정철과 김여정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조연준의 22(22)개념에 기초하여 장성택 숙청을 결정했다고 한다. 여기서 2이란 미제와 남조선 이외에 내부의 적을 만들어 치자는 것, 2 경제특구 등 외부개방과 함께 주민들 여행통제의 자유화를 의미했다. 9월부터 남북관계가 경색관계에 진입했다.

 

일곱째, 11월부터 장성택 세력에 대한 본격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장성택은 11 6일 안토니오 이

노끼와 회담 후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국가안전보위부는 11 18일 장성택을 가택 연금했다.

 

11 21일~26일 이용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공개처형되었다. 이후 12 13일 국가안전 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은 장성택에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은 곧바로 집행되었다. 장성택이 처형될 무렵 오극렬이 재부상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동향이 나타났다.

 

오극렬은 12 13일 사망한 김국태의 장의위원 명단에서도 정치국원인 김원홍의 앞에 거명되었다.

 

요약과 결론

 

김정일은 군부-조직지도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장성택을 득세시켰고, 김경희도 전면에 내세웠다.

김정일은 살아 있는 동안 김경희-장성택 연합을 후원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사망하자 김경희-장성

택 연합은 취약해졌고, 그 대신 군부-조직지도부 연합 세력이 재차 발호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군부-조직지도부의 동태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김경희의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2013년 하반기 장성택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군부-조직지도부 연합은 장성택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사건들 또는 관행들이 2013년 갑자기 ‘종파’와국가반역으로사건화되었고, 장성택 사형의 빌미로 활용되었다.

 

군부-조직지도부 연합과 김경희-장성택 연합은 세습 후계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주도권 경쟁

이 격화된 이유는 후계자를 옹위하는 데서 주도세력이 되어야, 후계자 치하에서 독점적 세도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장성택의 실각과 처형은 두 세력 중의 한 세력이 패배하여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장성택과 그 일파가 힘에서 밀리고 있지 않았다면, 장성택 숙청의 계기로 거론되는 여러 사건들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거나 또는 발생했더라도 장성택 숙청이라는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박 형 중 (북한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