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권력투쟁과 김일성 수령독재정권의 형성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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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

 

 

북한의 김일성이 해방 이후 소련군 대위의 신분으로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는데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으나 그 중 해방공간의 혼란, 한국전쟁, 스탈린의 사망, 중소분쟁, 8월 종파사건 등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과, 고비 때마다 그가 보여주었던 상황 예측력, 조직술, 선전선동능력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것이다. 즉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초기 개인 권력기반 구축에 성공했고, 한반도전쟁 과정을 통해 잠재적 경쟁세력의 제거를, -(중국-소련) 분쟁을 통해서 대외적 자주성 확보를, 빨치산 출신군부세력의 제거를 통해서는 神權的(신권적) 권력 회득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일성에게 있어 한반도 전쟁은 자신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하 글에서는 김일성이 일본의 패망과 함께 소련령으로 피신하여 있던중 소련의 도움으로 소련군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와 쟁쟁한 각파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고 신권적 1인독제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을 1950년대를 중심으로 간략히 논하여 보고자 한다.

 

 

2. 북한의 정치세력 - 4개의 파벌

 

 

1945 8월 일본이 패망한 후 한반도는얄타 비밀 협정포츠담 협정에 의하여 38도선으로 분할되어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각각 점령하게 된다.

두 초강대국은 냉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소련 점령당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철저한 통제하에 북한은 1950년대의 소련사회를 북한의 상황에 맞게 변형한 새로운 국가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이 아주 미약했기 때문에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지하여 공산화를 추진할 수 없어 소련의 전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25년 창단된 조선공산당은 자체 내의 파벌싸움으로 인해 코민테른의 특별결정에 의해 1928년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일본경찰의 통제와 극심한 탄압 하에도 비합법적인 활동을 계속 전개한 소수의 분산된 공산주의자들은 보다 발전된 지역인 남쪽지방에서 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 점령 초기부터 심각한 간부요원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북한에는 책임 있는 직책을 맡길 만한 현지 공산주의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은 북한의 공산화를 위하여 외국망명지에서 귀환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형성된 북한의 정치 엘리트 집단은 처음부터 정치적 경험이 매우 상이한 몇 개의 정파 대표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 중엽 북한 지도부는 4개의 파벌, 즉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빨치산파로 뚜렷이 나누어져 있었고, 1945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완전히 격리된 채 상호 아무런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파가 존재한다는 사실마저도 해방 이후인 1945-1946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1) 국내파

 

국내파는 일본식민지 통치기간 중 한반도에서 비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했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헌영은 극압적인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린 인물이다.

거듭되는 체포와 복역생활 속에서도 해방 될 때까지 그의 활동은 국내 사회주의 청년단체들과 연계되고조선 청년 총 동맹을 창설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여 1925 4 17일 공산주의 방식 항일 독립 투쟁 단체인 조선 공산당을 김재봉, 김약수와 함께 결성하여 체계적인 공산주의운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1930년대의 일제탄압은 조선 공산당의 활동을 마비시켜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피검되거나 해외로 도피, 투항하거나 혹은 운동을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지하운동 차원에서 진행된 일제하 후기 공산주의운동은 1939년 이관술, 이순금, 장순명, 권오직, 김섬,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 이인동 등이 당 재건을 위해 경성 콤.그룹(일명,서울 콤.그룹)을 조직함으로써 절정에 당한다. 이들 역시 박헌영을 책임자로 추대하고 대열을 정비했으나 40-41년에 걸친 검거로 해방될 때까지 명맥이 끊기고 만다.

이들은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퇴조기에서 다시 모든 운동가들이 운동선상에서 이탈해 버리거나 과거를 청산하고 나설 때에 운동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과 신진들을 포섭하여 당 재건대열에 혼연일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후일 출옥 이후, 자기 개인중심으로 써클 활동을 하며 박헌영의 재출현을 기다리고 있던 이 콤.그룹 멤버들은 한국의 공산주의운동가들, 최후의 결산적 집결단위였으며 국내파의 핵심체이자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기본핵심을 이룬다.

 

그러던중 1945 815일 해방이 되었고, 서울에서 당 재건결성을 위한 공작이 활발히 전개된다. 1945 9 8, 이영, 최익한, 정백, 정재달, 하필원, 이승엽, 이정윤, 최원택, 박헌영 등 60명이 열성자 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박헌영에게 위임하여 동년 9 11일 당 재건을 선포하고 국내의 여러 파벌들로 구성된 당 임시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이후 남북을 오가며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던 박헌영은 미 군정 당국이 조선공산당을 불법단체로 선포하고 1946 9 6일 박헌영을 비롯한 당원들에 대하여 체포령을 내리자 이를 피해 마지막으로 북한으로 탈출하여 북한정권의 수립과 함께 부수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 연안파

 

1920-30년대에 일제의 탄압에 쫓기어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상해지역에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보급하고, 무장조직으로 조선 의용대를 운영하였으며, 후에 김원봉을 제외하고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과 함께 연안으로 이동, 이를 모태로 1940년 해외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조직중 가장큰 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을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여 만들고, 그 예하에 무정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중공군과 함께 훈련도 같이하여 모택동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연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시경의 수제자이자 한글 학자인 김두봉을 지도자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연안파 인테리들은 이외에도 당시 중국공산당 군대였던 8로군 및 새로이 구성된 4로군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한인들이 참여하였다. 독립동맹 소속의 조선의용군은 해방이 되자 깃발을 들고 1945 12월 걸어서 북한으로 들어 왔으나, 소련군에게 신의주에서 무장해제를 당하여 중국의 단동으로 추방되어 모택동의 팔로군에 편입되어 1949년 중국의 국, 공 내전에 참가한 후 북한으로 들어와 북한정부의 군사계열에 많은 참여를 하였다. 연안파에는 김두봉을 위시하여 무정, 최창익, 허정숙, 박일우, 한빈, 윤공흠, 서희등이 있다.

 

 

3) 소련파

 

1860년대 소련으로 이주한 소련 국적의 한인 2세들로, 이들은 러시아 혁명당시 적군에 참가했던 인물들이 사회주의를 수용, 일크츠크 지방에서 고려 공산당을 조직, 상해파 공산당과 함께 통합하였으나, 러시아의 12월 테제로 인해 유지가 불가능해 지자 1928 12월에 해체를 하였고 이후 후진 세력이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한 관계로 스탈린의 억압과 극동에서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를 면하게 된 중.하위급 공산당원출신들로 이들은 소련군 사령부가 북한에서의 정책추진에 활용하기 위하여 1945년 가을 북한에 파견되었고, 초기에 이들은 소련군정기구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부터는 수립 중에 있던 북한의 정부기구들에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연안파와 소련파간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연안파 성원들은 조선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평양으로 온 거의 모든 소련파 한인들은 일제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소련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소련파는 소련에 태어나 북한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북한 정세에는 어두웠으나 특출한 러시아어 실력과 소련공산당의 도움으로 노동당의 언론을 담당하였고, 특히 김일성의 감시를 목적으로 하였다. 소련파로는 허가이를 비롯하여 박창옥, 방학세, 한일무, 김열, 남일, 김용범등이 새로이 수립된 북한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하였다.

 

 

 

4) 빨치산파(만주파)

 

- 형성 배경

 

김일성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활동하며 국내 연계 활동을 전개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빨치산운동 참가자들이 속해 있었고,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한 후 한반도의 전 지역에서는 빨치산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말 일본정부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함에 따라 빨치산들은 만주로 밀려나게 되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의 일부는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걸었으며, 일부는 공산주의적 슬로건 하에 중국공산당의 지휘하에 있는 동북 항일 연군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일본정부는 만주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빨치산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사실상 이들은 분쇄되었고, 여기서 살아남은 김일성을 비롯한 소수의 빨치산들은 1940-41년 겨울전투를 하면서 소련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근교로 후퇴를 하였다.

 

초기에 이 빨치산들은 소련의 극동지방에 특별히 구축된 막사에 거주하면서 교육을 받았으며, 때로는 소련군 지휘부가 조직한 만주에서의 정찰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2년 여름 국경을 넘어 소련에 온 빨치산들은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에 배속되었으며, 여단장은 만주빨치산운동의 베테랑으로 중국공산주의자인 주보중이었고 제1대대장으로는 하바로프스크 육군학교에서 단기간의 교육을 받고 소련군 대위가 된 김일성이 임명되었다.

 

이 여단은 주로 중국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한인들은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1대대에 배속되었다.

김일성의 소련생활은 해방 이후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는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만주에서의 빨치산활동을 하는 사이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던 조선인 혁명가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었고, 소련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 빨치산들은 자연스럽게 김일성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오랜 전투 기간 싸워온 신뢰와 조선혁명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매우 강한 단결력을 가지게 되었다.

 

 

- 김일성의 입국

 

김일성이 속해 있던 88여단은 극동 하바로프스크 근방에 있는 자신의 기지에 머무르면서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소련은 일본과의 군사작전에서 승리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많은 지역이 자신들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자 소련군은 사령부는 88여단을 해산하고, 그 장교 및 병사들을 귀국시켜 소련군 위수사령관들을 돕게 하였다. 그들은 소련군 신분을 유지하면서 소련 군정당국과 현지주민들 간의 접촉을 도와야 했다. 소련 군정당국의 통제하에 들어온 지역중 평양이 제일 큰 도시였으며, 따라서 88여단에 복무한 한인들 중에서 제일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은 장차 북한의 수도가 될 평양의 위수사령관 보좌역으로 배치가 된다.

 

그때에 소련 군정당국은 조만식 및 현지 민족주의자들과 제휴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자신들의 대북한 정책 실현과정에서 의지할 새로운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만식을 형식적인 북한의 지도자로 만들고 새로운 인물로 조만식을 보완케 하는 방안도 배제화지 않았다. 또한 당시 박헌영과 긴밀히 접촉을 가졌던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은 박헌영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그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25군 지휘부는 물론 모스크바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과거 만주지역 빨치산이었던 젊은 소련군 대위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사령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형성되고 있던 북한정부의 지도자를 물색하고 있던 소련군 장군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1945 8 38선분할 이후 북쪽을 점령하며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고 있던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정치담당관 메크레르에게 김일성이 북한 정국을 주도할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는 지시와 함께 김일성을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그에게 경호원을 붙여 비밀리에 지방을 순회시켜 각계의 유지와 접촉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 따라 김일성은 1945 9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평양주둔 위수사령관의 보좌역으로 원산항을 통하여 들어왔고, 김일성은 원산항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심복인 김일을 평북으로, 박성철과 최충국을 함북으로, 김책을 함흥으로, 오진우를 회령으로, 최현을 혜산으로 보내 지방사정을 탐문하도록 하고, 자신은 평양으로 들어와 정치담당관 메크레이의 주선으로 조만식 등 각계의 유지들과 면담하며 극비리에 김동환이라는 가명으로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해방 후 북한의 정세를 파악한 후, 김일성은 1945. 10.10비공개로 북조선 공산당을 창건하고(당창건은 북한의 주장이고 관련참가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10. 14.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위와 같이 김일성이 가명 등을 써가며 지방을 순시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지방에 파견하였던 것은 공산당 창건 준비와 인재 발굴이었다. 특히 정권 창출이 빨치산 세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60여명에 달하는 빨치산 세력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기술자, 전문가를 발굴, 추천하도록 하였으며, 이렇게 추천된 자들을 뒤에 세워지는 평양학원에 입교시켜 정권창출의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빨치산 세력들의 지방활동은 1948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김일성은 지방에 자파 세력을 확충하는데 주력함과 아울러, 이미 각급 지방 당 조직에 침투해 있던 국내파 세력의 약화, 분쇄에도 노력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입북 즉시부터 보안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46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임시인민위원회 산하 10개국 중 빨치산계열이 차지한 유일한 직책은 보안국(최용건)이었다. 또한 장교와 정치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평양학원이 1945 10월에 설립되어 원장에 김책이 임명되고, 1946년말까지 나남사단, 진남포여단, 강계포병연대, 철도경비대, 국경수비대, 비밀경찰등이 구성 되었고 이들 부대의 사령관으로 빨치산파인 안길이 임명된다.

 

또한 1948 9 9일 정부가 수립되자 , 군부를 관장하는 민족보위상 보위상에 최용건, 부상에 김일, 인민군총사령관에 강건이 임명되고 인민무력부의 요직 3국을 모두 빨치산출신들로 채웠다. 한편 보안대를 흡수한 내무성의 책임자로 연안파의 박일우가 임명되었으나 내무성 구성원 거의 대부분을 빨치산출신들이 충원되었다. 이처럼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들은 군대와 보안조직의 장악에 일찍이 성공하였으며, 이로써 여타 대항 세력들의 활동에 대한 감시, 통제는 물론 이들로부터의 도전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3. 여러 정치세력들의 연합과 김일성의 권력부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중심으

 

 

박헌영은 해방 이후 1945 9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1945. 10. 10-13일간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38이북지역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설치가 결정 되었고, 김용범을 책임비서, 무정, 오기섭을 제2비서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1945 12월 김일성은 당시 박헌영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서울소재 중앙위원회에 예속된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의 서기로 선출되어 당 장악을 시작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45. 11월에 창당하였고, 1946초 신탁통치 찬반에서 반탁을 주장하다가 연금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의 지도부가 미군이 통제하고 있던 남한지역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소련군정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게다가 소련의 군 및 정치 지도층은 박헌영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코민테른에 관계했던 인물로서 소련과의 유대도 매우 미약한 박헌영이 한국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는 것에 대하여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6 4월 서울과 북조선분국 간의 형식적인 종속관계를 타파하고 평양에서 빨치산파, 국내파, 소련파의 대표들이 모여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였다. 연안파는 처음에는 북조선공산당에 참가하지 않고 그 대신 1946 2월 독립동맹을 모태로 한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당은 오래 존속하지 못하였고, 1946 8 29일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김두봉(연안파), 주영하(국내파)로 하는 북조선노동당을 탄생시켰다.

 

얼마 후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연안파 남측계열) 그리고 인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 당은 불법정치단체로 간주하는 미군정에 의하여 박헌영을 비롯한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고 1946 9 7일 이후 이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넘어와 평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이 1949. 6. 30. 조선노동당으로 통합하여 위원장에 김일성이 부위원장에 박헌영, 허가이(소련파)가 임명되어 드디어 김일성은 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단일 공산당을 창건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소련에게 가장 적합한 인물인 김일성에게 공산당의 지도자 자리를 맡기려는 소련의 주도에 의하여 분당과 합당이 1940년대 말에 완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물론 그의 측근들도 새로이 조성된 상황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1940년대 말 김일성의 지도적 위치는 공개적으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완전한 정치권력을 갈망하였으나 이는 소련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은 물론 다른 3개 파벌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40년대 말까지 4개 정파간의 모순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이는 파벌간의 갈등을 우려하여, 김일성의 입장과 소련파를 중시하면서도 파벌간의 균형을 유지하려던 소련군정의 노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 파벌간의 관계가 처음부터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각기 공통의 과거와 시각 및 습관으로 결합되어 있는 각 정파의 구성원들은 아무런 연관을 맺고 있지 않았으며, 각 정파는 나름의 비공식적인 교제대상 및 자신들이 인정 혹은 반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지도자들을 갖고 있었다. 각 정파들간의 상호 경계심은 그들의 만남 초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파는 연안파와 소련파를 자신들이 전개했던 지하투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망명자에 불과한 것으로 의심하였고, 빨치산파는 소련파를 사이비 조선인으로 간주하여 싫어했으며, 소련파는 그들대로 빨치산파를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및 행정 경험이 없다고 무시하였다.

 

한편 1945 11 19일에는 5도인민위원회의 과도적 중앙기관이며 연락 기능만을 수행하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이 평양에 설치되었고, 국장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인 조만식이 겸임되었다. 이리하여 북한에는 소련의 형식적인 간접통치체제가 수립되었다.

 

또한 1946 2월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으로 인하여 반탁으로 돌아선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고 5도 행정국을 북조선임시위원회로 개칭하여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김두봉을 임명하여 행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부수립의 기초작업에 착수하면서, 임시위원회를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개칭하고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김책, 홍기주를 임명하였다.

 

북한의 공식적인 정부 수립 움직임은 1947년 가을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와 북한 불응시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수립을 결의 한데서 촉발되었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거부의사를 표명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지도부는 전 조선을 대표하는 통일정부 결성을 기치로 내세우며 정부수립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이후 1947 1128일 북한인민위원회 제3차 회의는 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어 헌법초안이 완성되어 4 28일 소집된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통과되었다.

1948 7월에 남조선노동당의 지하조직을 이용하여 평양에 세워질 이른바 전국적인 정부에 참여할 남쪽 대표 1,080명을 뽑았다. 그리고 이들 중 997명이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그해 8월에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해서 우리의 국회와 비슷한 위상을 가진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할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였다. 바로 이들이 1948 8 25일에 치러진 북한지역 선거를 통해서 뽑힌 212명과 합해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1948 93일 평양에서 첫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동년 9 9일 김일성을 내각수상으로 박헌영을 부수상, 홍명희, 김책이 임명되는등 국내파 10(남출신 7), 연안파 2, 빨치산파 4명의 각료가 임명되어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빨치산파가가 각각 권력을 분점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4. 한국전쟁과 국내파의 숙청

 

1) 한국전쟁과 파벌숙청의 기반조성

 

한국전쟁은 1950 6 25일 이른바 민족해방을 꿈꾸고 있던 북한 지도부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626일 김일성은 북한주민에게 전 주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하는 한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쟁기간 중에 국가의 일체권력을 장악할 군사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구성하여 국가운영을 전시체제로 전환시켰다.

 

전쟁초반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으나 전세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되어 수십만 명의 주력부대가 낙동강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또다시 역전되었고, 그 뒤 전쟁은 몇 차례의 공방전 끝에 1951 6월부터 지금의 휴전선 근방에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양측은 1951 7월부터 휴전회담에 들어갔고, 휴전회담은 2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었으며, 그 동안 38선 일대의 전선에서는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기들이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북한의 전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였다. 결국 회담은 1953 7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끝이 났으며, 이와 함께 전쟁도 중단 되었다. 한국전쟁은 북한지도부 및 소련과 북경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로 귀결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중국 인민의용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북한은 겨우 괴멸을 면할 수 있었다. 의용군을 파견하여 괴멸해 가는 북한을 구한 중국의 영향력은 당연히 다소간 약화된 소련의 영향력과는 달리 강화되었다. 김일성은 이를 다른 정파에 대한 최초의 일격을 가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 첫 번째로, 일제하 연안에서 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총 사령을 지낸 무정을 전쟁중인 1950 1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에서 전투과정에서 평양방위사령관 직책을 맡았으나 방어작전을 해보지도 않은 채 중국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구실과 지시 불복종, 법적 절차 없이 사살한 책임 등으로 처벌을 받고 직책이 강등되었다.

 

또한 소련파의 중심이며 당 조직담당이었던 허가이는 지나치게 전쟁중의 당증 분실문제에 침착, 그것을 이유로 1950-1951년 기간에 무려 당원의 75%를 출당시키고 당원의 자격을 노동자중심으로 제한한 것에 대하여 김일성과 대립하다가 1951 11월에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다.

 

김일성에게 허가이는 떨쳐버리려 했던 소련의 통제력을 상징하는 인물의 하나였다. 이외에도 허가이의 제거는 필연적으로 소련파의 지위 훼손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허가이의 제거로 소련파 한인들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들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한인들에 대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개시할 수 없었다. 이 경우 모스크바나 북경이 직접 개입할 위험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허가이가 숙청된 후 그가 맡았던 직책에 다른 소련파 한인을 앉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다른 소련파 성원들을 진정시킴은 물론 모스크바에 대해서도 허가이의 숙청이 소련파 한인들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2) 국내파의 숙청

 

김일성은 한국 전쟁기간 중 숙청의 첫 번째 대상으로 중국 및 소련과 특별한 연계가 없이 외부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기대할 수가 없는 국내파를 주공격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더욱이 모스크바 당국은 과거 코민테른 성원이며 처음에는 일제 통치하에서, 그 다음에는 미군정하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박헌영 및 그의 측근들을 상당히 의심하였다. 외부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과거의 지하 운동가들은 너무 쉽고 안전한 희생물이었으므로 빨치산파 뿐만 아니라 다른 파들도 국내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외에도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2년말 남한내 빨치산 및 지하운동 조직에 대한 통제문제는 중요성을 상실케 되었으며, 따라서 국내파의 숙청이 남한의 비합법적인 조직들과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국내파에 대한 공격의 신호는 1952 12월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행한 장문의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연설문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종파주의에 대한 수많은 지적은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허가이가 숙청된 후 소련파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던 박창옥이 전원회의에서 한 발언은 보다 구체적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설에서 수많은 과거 남로당 지도자들을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1953년초에 평양 시내에는 국가 전복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이러한 소문에 뒤이어 국내파 지도자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주로 북한에서 대남공작에 투입되는 빨치산부대 및 파괴 공작조들을 훈련시키던 사람들이었다. 여러 상황을 볼 때에 1953년 초는 사실상 어떠한 국가 전복 기도도 없었으나 국내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김일파가 이런 허구의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1953년 초 남로당출신의 리승엽, 리강국, 설정식, 임화 배철, 박승원, 조일명등을 비롯한 국내파 12명이 김일성 정권의 전복을 시도하여 박헌영을 수상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국가전복모의,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파괴, 식민지시절 일본경찰과의 협력, 그리고 미국의 간첩행위 등 4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1주일 후인 1953 83~6일간 열린 재판에서 윤슌달과 리원조를 제외한 10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김일성파는 치밀한 준비와 위 12명에 대한 재판을 통하여 박헌영의 변절과 추락을 일단 확인하고 자료를 준비한 후 반박헌영 여론을 불러일으킨 다음 좀 여유를 가지고 그를 재판하는 것이 분명히 정치적으로 안전한 방법이라 판단하고, 1955 1214~15일 평양에서 열린 재판에서 박헌영도 위 4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8시간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56년 가을에 처형되었다.

 

1953년의 박헌영에 대한 재판 이후 북한 전역에 걸쳐 과거 남로당의 열성당원들에 대한 체포가 진행되었으며 그 죄목은 간첩활동과 종파행위였다. 그렇다고 이것이 국내파를 전부다 숙청한 것은 아니고 남한출신이 아닌 북한지역의 남로당출신들은 숙청을 면하였으며, 1956년 조선 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들 중 국내파의 비중은 1948, 즉 남-북 노동당이 합당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22%에서 34%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승엽과 박헌영의 재판후 국내파는 사실상 지도자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이로 인해 1953-56년 기간 중 숙청을 면한 사람들은 그 후 쉽사리 숙청의 희생물로 전락되었다. 사실상 1950년대 후반 국내파는 존재의의를 잃어버렸다. 국내파의 숙청은 빨치산파에 의하여 주도 되었으나 소련파와 연안파도 이에 협력을 하였다. 이들도 국내파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숙청에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김일성은 각 정파의 불화를 활용하여 국내파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막바지에 그들의 범죄를 전쟁에 대한 책임전가의 절호의 기회를 삼으면서 그것을 과장, 확대 왜곡하며, 한편으로는 정적이었던 박헌영을 제거하는데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남로당계열의 숙청은 커다란 정치적 충격을 불러 일으켰지만 실제로 그것은 김일성 중심의 정권에 별다른 타격이나 분열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위와 같이 김일성은 남로당출신들을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누군가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김일성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고 그것은 김일성의 퇴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최대의 정적이며 이질적이었던 남로당계열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김일성에게 양면적 이득을 주는 것이었다.

 

5. 8월 종파사건과 연안파, 소련파의 숙청

 

 

) 중소분쟁, 그리고 8월 종파사건

 

스탈린이 1953 3 5일 사망한 후 권력을 장악한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을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전쟁 불가피론에 대한 수정과 스탈린의 개인 숭배정책을 비난하고 나서자, . (-)관계는 곧 냉각되기 시작했다. 서로를 수정주의, 또는 교조주의로 피난하는 가운데 격화되기 시작한 中. 蘇 분쟁은 북한측에 어떠한 선택을 강요하였다. -소 두 나라가 모두 자신의 지지를 요청하는 가운데 북한이 선택한 결정은 등거리정책 내지 자주노선의 견지였다. 자주노선의 견지는 북한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다소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추구될 수 있었다. 오히려 김일성 개인으로서는 중-소분쟁이 그동안 소련과 중국의 입김으로 인해 충분히 제압하지 못하였던 연안파나 소련파에 대한 제거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여 주었고, 그 계기가 1956 8, 소위 8월 종파사건으로 의해 마련되었다.

 

1953 3월 스탈린의 사망은 동구권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새로이 당서기에 임명된 흐루시초프는 19562월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평화공존의 제창과 더불어 그 동안 신격화되어 오던 스탈린에 대한 격하운동을 시도하였다. 소련으로부터 밀어닥친 스탈린 격하 운동은 평양의 대광장을 스탈린 광장으로 명명하고 거리의 모든 군중집회마다 대형 초상화를 내걸고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북한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스탈린의 정치수법을 모방하여 자신의 활동을 최상급 어휘로 치장하고 기념비를 각처에 건립하여 개인숭배를 조장한 김일성으로서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김일성의 정권 장악은 스탈린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고, 1945년 이후 북한이 김일성을 정점으로 구축해온 사회주의체제는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를 포함하여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스탈린 체제의 변형이나 붕괴는 김일성 중심 정권의 변화를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김일성은 1956 4월 조선노동당 3차 대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와 당내 민주주의에 관해 몇 가지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개인숭배로 비판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박헌영을 비롯한 종파분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떠넘기려 하였다.

 

3차 당대회가 폐회된 후 1956 6 1일부터 7 19일까지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정부대표단이 앞으로 진행하게 될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하여 소련과 동구 순방길에 오른다. 그 사이 반김일성 세력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그의 일인독재에 반기를 들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공모해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부수상 겸 재무상 최창익을 중심으로 직업동맹위원장 서희, 상업상 윤공흠, 황해남도 당위원장 고봉기 등의 연안파와 박창옥을 중심으로 하는 건설상 김승화, 부수상겸 국가건설위원장 박의완등의 소련파가 손을 잡고, 여기에 건제공업국장 이필규, 남로당 출신의 석탄공업상 유춘운, 그리고 오기섭등의 국내파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반김일성 연합전선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반 김일성의 움직임은 연안파인 김창만에 의해 수상대리를 맡고 있는 빨치산파의 최용건에게 비밀리에 보고가 되었고, 이를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순방일자를 앞당겨 급거 귀국하였다.

 

 

) 연안파에 대한 숙청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은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전원회의를 맞이하였다. 김일성은 연안파인 윤공흠과 그의 주변사람들의 발언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사건이 발생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1956 8 30-31일에 개최되었으며, 회의 안건은 김일성의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방문결과 보고와 당의 당면과업, 인민보건의 개선방향이었다.

 

첫날 오전 회의에서 김일성은 순방에 대한 보고를 하였는데, 여기에서 당연히 소련에서의 개인숭배와 투쟁 및 이것이 북한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김일성은 북한에 개인숭배의 징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발언을 빌미로 윤공흠과 그 측근들은 행동을 시작하였는데 윤공흠이 발언권을 요구하여 김일성이 법을 위반하고 개인숭배를 전파하려 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연안파와 소련파에 의해 이 회의는 김일성 개인숭배와 정책노선에 대한 규탄장으로 돌변하였다.

 

그리고 연안파인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인 서휘, 상업상인 윤공흠이 발언권을 얻어 김일성의 정책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사건은 김일성의 계획대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들 대부분은 윤공흠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을죄를 지은 사람으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공흠을 지지하는 2명의 연안파가 발언을 하였으나 이들은 전원회의가 끝나기 전에 윤공흠과 같이 가택연금 되고, 윤공흠과 그의 지지자들을 당에서 제명하고 직책을 박탈하였다.

 

윤공흠과 그의 지지자들이 반발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그들은 소련공산당 제20차 전원회의 이후 소련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영향으로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고 있었는지, 아니면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인 간섭을 기대했는지, 중국지도부가 거사의 준비과정에서 사전에 어느 정도나 통보를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연안파가 자신들의 거사계획을 북경에 통보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거사 이후 북한은 사상의 온건성을 위한 검열, 이른바 사상검열을 대규모로 전개하였다. 사상검열이란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들이대는 일련의 심문으로, 때로는 심문을 며칠씩 계속되었으며, 특별모임을 열어 자신의 동료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 많은 경우 사상검열은 체포의 전주곡이었다.

 

사상검열의 주요목표는 연안파였으나 1958년에 이미 몇 명의 소련파도 희생되었다. 대규모의 숙청과 혹독한 탄압의 결과 약 1년 동안의 기간에 연안파는 완전히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테러의 격랑속에서 연안파의 권위있는 지도자이자 유명한 국어학자인 동시에 혁명가이며 북조선공산당 위원장을 맡았던 김두봉도 희생되었다. 일부 연안파 출신들이 아직 이러저러한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였으며 그나마 급격히 감소되어 단일세력으로서의 활동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 소련파의 숙청

 

연안파를 제거한 후 김일성의 입장에서 신뢰할 수 없는 마지막 집단은 소련출신 한인들이었다. 모든 주요직책을 빨치산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중-소간의 갈등으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1945-59년의 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6. 25전쟁에 대한 소련의 소극적인 지원과 그와 대조적으로 중국의 직접적인 참여와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하여 소련의 영향력은 계속 감소되고 있어 소련의 직접적인 개입가능성은 거의 없어져 소련파를 숙청할 수 있는 호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소련파에 대한 첫 체포는 1958년 가을과 겨울에 시작되어 그 다음해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사회의 상황을 볼 때 체포된 사람들의 운명 및 구체적인 기소 내용을 알아낸다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하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반당파 활동의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와 같이 처음에 연안파를 대상으로 시작된 종파분자들과의 투쟁 캠페인은 어느덧 소련파 한인들을 숙청하고 추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1950년대 말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냉각되고 탄압이 강화되면서 소련파 한인들에게 있어서 소련과의 연계는 특권이 아니라 위험의 근원으로 변화되었다. 소련파의 일부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다른 소련파 한인들은 숙청하는데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한가지 즉, 어떻게 하면 소련으로 돌아갈 것 인가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첫 체포가 시작된 직후인 1958년 이래 소련파들의 대대적인 귀환이 시작되어 1960년말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은 처음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련파 한인들이 소련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장려하였다.

 

김일성이 달성하려는 기본 목표는 소련파를 정치적으로 숙청하는 것이었지 그 성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억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즉 북한을 떠나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다만 1962년부터 당시 소련파는 숙청의 희생물로 전락하거나 소련으로 돌아가거나 해서 더 이상 의미있는 정치적 파벌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자 그때부터 북한의 관계기관들은 소련파 한인들이 북한으로 떠나는 것을 막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 지도부는 소련파 한인들의 숙청을 저지하거나 체포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내정간섭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한 소련지도부는 소련과 북한관의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제하였던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였는데, 그들도 아마 소련인들과 동일한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소련과 중국 외교의 소극성은 김일성을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정적들을 아무런 방해 없이 숙청 할 수 있게 하였다.

 

 

6. 김일성 유일권력의 확립

 

1957-1958년에 걸쳐 당, 정부, 군에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여 80여명의 간부급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1957년 최고 인민회 상임위원장 자리에서 김두봉이 물러나고 대신 최용건이 들어섰다. 1957년 제2차 내각은 김일이 제1부수상이 되면서 거의 빨치산파나 지지자들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1958년 초에는 문학계 내부 특히 평론분야에서도반 종파투쟁이이 진행되었다.

 

1958 10월에는 김일성 「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낡은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을 힘있게 벌일 데 대하여」를 통하여 문학계 내부에 잔존하고 있는부르조아 잔재와 투쟁할 것을 강조하였다.

 

1958년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식민지투쟁사의 중심에 놓은 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가 발간되었다. 1959년에는 김일성 중심의 만주 빨치산의 투쟁 경험을 기록한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제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만주계의 역사독점이 시작된 것이며 그것은 권력독점이 완성된 것을 의미했다.

 

위와 같이 1950년대 말 북한지도부의 파벌투쟁은 김일성의 빨치산파가 완전한 승리로 종식되었다.

김일성의 승리는 위대한 수령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속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공고화 되었다.

1961년 김일성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중앙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비록 여전히 다른 파 출신들이 있기는 하지만 빨치산 출신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1961년대 초 북한에는 김일성의 1인 독재체제가 수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내외 정책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발생되었다. 문화, 경제, 국가운영에서 소련방식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풍조가 사라지고, 주체(바로 이 때부터 주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노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외국 것보다 조선의 것이 우월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대외정책도 현저하게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전의 유순하던 소련의 위성국으로부터 북한은 소련과 중국 사이를 교묘하게 헤쳐나가면서 이 두 강대국 간의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는 나라로 변화되었다. 동시에 체제는 본질적으로 경직되기 시작하였으며 1950년대 북한 주민들이 누릴 수 있었던 상징적인 자유는 완전히 박탈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경쟁파벌을 숙청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김일성이 승리를 가능케 한 50년대의 정치적 원동력은 무엇인가.

 

첫째로 1946년에 굳힌 군사적 헤게모니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빨치산파의 유격대투쟁경력의 결과로 한편으로는 소련의 김일성에 대한 지원과 연안파의 입국시 소련군이 그들을 무장해제한 결정적인 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두 번째로 빨치산파의 정치적 능력이다.

그들은 숫자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잠정적인 연합과 연합해체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반김일성파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탁월한 정치적 기술을 보여줬다.

 

국내파의 제거는 소련파와 연안파를 동원하고, 소련파의 제거는 연안파를 이용하고, 연안파의 제거는 일부 소련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세 번째로 김일성의 단결력이다.

국내파는 박헌영이 이끌었지만 확고한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연안파는 마땅한 구심적 인물이 없었고 소련파는 남일, 박정애, 방학세등 상당수 핵심 인물들이 김일성 지지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고, 국내파는 이념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소련파는 이념적인 동질성은 있었지만 그것은 공동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추상적 이론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김일성계 만주 빨치산만이 공동의 투쟁경험에 기초한 매우 높은 수준의 이념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는 대부분의 모의나 언동은 쉽게 김일성에게 포착되었다.

 

네 번째로 김일성계 만주 빨치산출신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철저히 뭉쳐 있었다.

그 누구도 김일성의 자리를 엿보지 않았으며 다른 파벌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김일성에게 필적할 만한 유일한 지도자 최용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1956 8월에 최용건이 김일성을 배반하고 연안파에 협력했더라면 김일성의 제거는 가능했었을 것이며 빨치산파는 아마도 최용건을 정점으로 다른 파, 아마도 연안파와 다수의 소련파 소수와 협력하여 새로운 정권을 구성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하급 당원들의 지지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전쟁 후에 입당한 사람들이며 1945-1950년 개혁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소련파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느꼈으며 민족주의적 정서로 인하여 소련파 한인 지도자에게 별다른 호감을 갖지 못하였다. 국내파 인사나 연안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들과 출신성분이나 교육경력에 있어서 별다르지 않으며 매우 대중적 생활방식을 갖고 있었던무식한김일성과 만주파의 일꾼들에게는 더 친근감을 느꼈던 것이다.

 

7. 결론

 

1950년대에 일어난 북한의 정치적 변화는 북한 사회주의 노선과 성격, 권력구조를 확정하는데 결정적 토대를 마련했다.

김일성은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를 차례차례 성공적으로 제거함으로써 1945년에서 1952년까지 유지되었던 좌파 연합 정권의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대신 빨치산파에 의한 단일적 헤게모니에 토대한 정권구조의 틀을 마련하였고 그것은 빨치산파 우위체제에서 빨치산파 유일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50년대의 숙청의 폭풍이 사라진 후 당, 정부, 군에 있어서 반김일성계의 영향력은 전면적으로 사라졌으며 일부 비김일성계의 인물들은 새로운 김일성 지지세력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소련의 지지와 후원 속에서 1945-1946년에 정권의 수반에 올라섰던 김일성과 그를 중심으로 한 만주 빨치산출신 세력은 국내기반의 협소함, 정치적 경험을 갖춘 공산주의자들의 부재, 명망성의 부족, 수적인 열세 등의 문제로 50년대 초반까지 다른 파벌의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에 의존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김일성 세력은 불과 7,8년이 안 되는 기간에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탈피하는데 성공하여 정권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