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 2011 10월 인터뷰 취재=안찬일 탈북자유민 1호 박사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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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은 남한 국민으로, 13년은 북한 인민으로, 17년은 무국적자로, 16년은 옛 소련 공민으로 현대사의 격류에 휩쓸려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인물이 있다.

분단된 조국이 낳은 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88)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차이콥스키의 4대 제자’,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으로 불릴 정도의천재 작곡가로 평가 되지만 북한에서는 반동분자,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낙인 찍힌 탓에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정추 선생은 해방 직후인 1946년 형인 정춘재 영화감독을 따라 월북했다.

북한에서 평양음대 교수로 일하다 1953년 구 소련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대로 유학을 떠난다. 1957년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열린 북한 유학생 토론대회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된다.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추방된 후 17년간 무국적자의 삶을 살다가 1975년 소련 공민증을 받았다. 소련과 카자흐스탄에서는 천재 작곡가로 유명했던 그였지만 한국에서는 1946년 사망처리 된 월북자였다가 국제적 명성이 알려지면서 1994년이 되어서야 되살아났다.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그지만 한반도 통일과 북한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가 한국을 찾았다. 2011년 아시아문화포럼의 특별강연과 ()미래전략연구원이 통일부 지원으로 진행 중인북한현대사 바로 알기사업 일환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취재진은 정추 선생을 만나 66년 분단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해방직후인 1946년에 월북을 결심 했다. 특별한 동기가 있을 것 같은데.

 

“영화감독이었던 형 정춘재의 영향이 가장 컸다. 서울에서 영화 동맹을 조직하고 영화제작소를 운영하고 있던 형은민족전선이라는 영화 촬영을 위해 1942 2월 북한으로 가게 됐다.

 

촬영을 마치고 남한으로 돌아가려 하자 북한 당국이 형을 설득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해방이 됐는데 어디서 일하느냐가 뭐가 중요한가, 매일 나오는 법령을 기록할 사람이 없으니 도와 달라, 평양에서 영화촬영소를 책임지고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북한에 남기로 결심하게 됐다.

평양에서 일을 시작한 형은 인편을 통해 나에게 북한으로 와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23살의 젊은 나이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북한에 호기심이 생겼고 월북을 결심 했다. 어머니에게 며칠 동안 북한에 다녀오겠다 말씀 드리고 38선을 넘었다.”

 

 

 

- 월북 당시 북한에 대한 환상이 있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받은 첫 느낌은 어땠는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바로 느꼈다. 소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민정권을 건립한다고 하지만 지식인들에겐 해당 대상이 아니었다.

 

노동자, 농민만 우대하고 조직체계, 인사권에 있어서 지식인들은 제외대상이었다. 상당한 모순이라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여기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북한에서 있는 동안 어떤 일들을 했는가?

 

“올라가자마자 음악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춘재 형이 영화촬영소를 만든 후 음악과장이라는 직함으로 기록영화의 음악관련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머릿속은 항상 혼란스러웠다.

 

형이 북한 당국의 부탁에 고향으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영화촬영소를 설립했지만 다른 사람이 영화촬영소 소장 자리에 올랐다. 남한 출신이고 인맥이 없다 보니 인사권에서 밀린 것이다.

더욱이 소장은 일제 강점기에 김일성을 잡으러 다니는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성분이 안 좋은 남한 출신 지식인보다 인맥이 있는 친일파가 더 인정받는 이 땅에서 출세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김원균과 같은 유명한 음악인들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어떤 과정을 거쳐 유학생으로 선발 됐는가?

 

“북한에서 박헌영을 비롯한 남노당계 숙청이 이뤄지면서 남한 출신들의 입지는 많이 좁아 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래 전에 품었던 유학의 꿈은 일찍이 접어야만 했다.

 

그런데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평양에 소련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전쟁 중 희생한 간부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북한 당국의 조치였다. 누구나 응시 가능하기에 나에게는 기회였다.

 

만경대 앞 작은 섬에서 수학, 영어 등을 시험 봤고 합격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나도 놀랐다.

6개월 간 유학생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다음해인 1953 6기생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사회주의권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스쿨에 입학했다.”

 

 

 

- 소련 유학 시절 반 김일성, 반 개인숭배 운동에 앞장섰다. 그 동기는 무엇인가?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가 열렸고 스탈린의 개인숭배 문제가 공산당 서기장인 흐루시초프에 의해 정식 제기 됐다.

 

모스크바의 예술인, 교육인, 교수 등 지식인들 속에서스탈린 격하 운동은 큰 이슈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흐루시초프의 문제제기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조선 유학생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숭배는 나쁘며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조선 유학생들의 인식 변화는 자연스럽게 김일성의 개인숭배 비판으로 이어졌다.

 

일부 유학생들과 함께 북한 정권도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 결정에 의해 북한도 개인숭배를 배척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지었다. 1957 10 17일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연린전 소련 북한유학생 대회에서 토론자로 직접 나가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게 됐다.”

 

 

 

-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소련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56년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주도로 반당·반종파 투쟁이 추진 됐다. 남로당계에 이어 소련파, 연안파까지 숙청 대상이었다. 소련 유학생들도 사상 검열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나와반독재, 반 개인우상을 외쳤던 학생들은 사상검열 1순위였고, 북한 당국으로부터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북한으로 돌아가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살아남기 위해 정치적 망명을 해야만 했다.

 

북한 당국은 소련 정부에 나를 비롯하여 망명 신청을 한 조선 유학생들을 체포해 송환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소련파 숙청으로 북-소 관계는 경색되어 있었다.

소련 정부는 나를 북한에 송환하지 않는 대신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추방했다.

 

그 후 17년간 무국적자의 삶을 살다가 1975년 소련 공민증을 받았다. 반면 망명 신청을 하지 않았던 유학생들 전원 북한으로 소환됐다.

이 후 북한 당국은 30년간이나 유학을 금지시켰다.

함께 유학을 왔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원균도 이때 평양으로 돌아갔다. 반 김일성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던 그는 귀국 후 북한 음악계를 주도하면서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김일성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 소련 유학 당시 형 정춘재는 북한에 남아 있었다. 정치적 망명 후 형은 어떻게 됐는가?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소련 유학시기이었다. 북한에서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형은 영화편집을 위해 소련을 방문하게 됐다.

 

북한의 영화 편집 설비가 좋지 않아 모스크바 필름의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영화대학 학생들과 예술인들과 만남이 잦았던 형은 그들과 함께 김일성의 개인독재, 신격화를 반대하는 토론을 벌렸고 그들과 뜻을 같이 했다.

 

영화 편집을 마친 형은나는 여기서 당 학교를 졸업하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마지막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일성이 봤을 때 형은 반당·반종파분자가 분명 했다.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확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북한에 형수와 아이 5명이 있었는데 그들과도 연락이 안 된다. 나 역시 이산가족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추방되어 17년을 무국적자의 삶을 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들었다.

 

“알마티로 거처를 옮기기 전 도망자로 살면서 차이콥스키 음악스쿨을 졸업했다.

졸업 작품인조국은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만점을 받았다.

소련에서 차이콥스키의 3대 제자로 불렸던 지도 교수는 나를 ‘4대 제자라고 불렀다.

 

소련 정부도 재능을 인정했는지 1961년 성대하게 진행된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 나의 작품인뗏목의 노래를 올렸다.

유리 가가린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우주인이다. 알마티로 추방돼서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밀려온 고려 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구전 가요를 채보(採譜)하는 일을 10년 넘게 했다.

 

채보한 음악을소련의 고려가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담은 교향곡 ‘1937 9 11일 스탈린을 완성했다.”

 

 

 

- 고향 땅을 밟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58년 음악대학을 졸업하면서 흐루시초프에게 정치망명 청원서를 직접 썼다.

 

편지에 흐루시초프가 주장한 개인숭배와 독재 반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북한의 독재가 없어지는 날 돌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도 표현했다.

 

나의 진실 되고 절박한 심정이 통했는지 흐루시초프로부터 답장을 받았고 58 8월 알마티로 갔다. 망명지에서 생활하면서 고향 땅을 잊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쉽게 갈 수가 없었다.

 

당시 한국은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공을 국가적 이념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소련과 적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면 당연히 소련 당국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고 잘못 됐을 수도 있었기에 기다렸다.

 

소련이 개혁개방이 되고 옐친 시대가 되면서 고향 땅을 밟을 길이 열렸다. 1989년 한국 정부가 주최한해외동포 모임에 소련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 4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 현재조선민주구국전선라는 단체의 의장직을 맡고 있다. 어떤 조직인가?

 

“말 그대로 구국전선이다. 북한의 독재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교체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정당, 시민단체, 개인들이 힘을 합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이다.

 

1992년 정치 망명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었고 현재까지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93년에 워싱턴 구국전선 대회를 시작으로 94년에는 한국 서울, 95년에는 도쿄, 97년에 다시 도쿄에 열었다.

 

신문도 창간해 40호를 발간했다.

지난 15년간 많은 성과를 냈다고 본다. 물론 어려움도 있다.

 

정치적인 활동이라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이 돼야 활성화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구전선은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며 회원들의 모금 활동을 통해 단체를 운영해가고 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김정일 독재정권 반대와 북한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 남한에는 23,000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이 있다. 독재 반대를 외친 1세대로서 탈북자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북한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탈북자다. 김정일 독재체제의 최대 피해자이기에 고향땅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본다.

 

시급한 것은 남한 내에 북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다. 현재 남한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에 의해 북한의 진실이 왜곡되는 경향이 많다.

 

종북, 친북주의자들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탈북자들이 일어서야 한다. 북한의 현실을 직접 증언하는 탈북자 앞에서는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투쟁 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조직을 만들고 연합하여 힘을 합쳐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는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며 고향 땅으로 돌아갈 날을 앞당기는 길이다.”

 

 

 

- 김정일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독재를 그만두고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인민이 주인인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고 하지만 김정일이 왕이고 자기 말이 곧 법인 세상을 만들어 놨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시켰고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됐다.

지금도 3대 세습을 꾀하고 있고 강성대국을 건설한다는 말로 북한 주민들을 속이고 있다.

김정일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통일은 어렵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공존할 수 없다. 김정일도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고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 한국 정부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지난 좌파정권 10년간 잘못된 정책의 방향으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던 독재정권을 소생시켜 줬다.

 

뿐만 아니라 원자탄을 만들어 한국과 세계를 상대로 위험한 핵 도박을 벌리고 있다.

 

한국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다.

이러한 과오를 두 번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대북관을 가지고 대북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남북한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북한이 독재국가이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된 것도 남북한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통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통일 대비 비용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을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기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본다.

 

정부가 직접 나서기 힘들다면 그런 활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들을 도와야 한다. 물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통일을 위해 탈북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북한을 잘 아는 이들이 통일 후 고향 땅에 가서 할 일은 엄청나다. 이처럼 남한 정부가 할 일과 과제들은 많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럽다. 각성하고 제대로 된 대북정책 방향을 세웠으면 좋겠다.”

 

 

 

 

프리엔케이 협력 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