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수기 [연재]

필자는 전 국가안전보위부 24국에서 외화벌이 담당 책임지도원으로 근무하다가 김정일 독재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2005년 자유를 찾아 탈북 하였다. 자유와 민주,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남한에 와서 필자의 탈북 결심이 백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1 나의 인생전환

나는 간부인 부모들의 덕으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비서국 대상(중앙당 비서국 비준대상의 간부: 비서국 대상의 자녀들은 군복무를 3년간만 하도록 하였음)으로 군복무도 남들처럼 13년이 아니라 군단직속 경비소대에서 3년밖에 하지 않고 대학에 추천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상위(중위와 대위의 중간)의 계급으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입대하였다. 처음 발령받은 곳이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청사(대호명 오봉산)의 내부지도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컴퓨터가 없이 하루에도 수많은 문건들을 선별, 등록하고 보고하는 등 수작업으로 씨름을 해야 하는 내부지도원의 업무는 방대한 것이다. 당시 사무실에는 펜티움 I급의 컴퓨터가 있었지만 다룰 사람이 없어 먼지만 싸여 있었다.

문건들은 관내 요시찰명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민동향까지 다 들어 있었다. 우선 요시찰명단은 삼각 표시로 구분하는데 체포직전의 중요 요시찰감시대상은 빨간색 삼각, 그다음 대상은 노란색 삼각, 적당한 정도는 파란색 삼각부호로 표시한다.

또 주민동향은 주민구성을 몇 가지로 구분하여 핵심군중(열성당원 및 성분이 좋은 사람)과 복잡군중(출신성분이 나쁘거나 가정환경이 나쁜사람)등으로 나누어 담당보위원들이 그들의 현 생활을 일일이 정보원들을 통하여 체크하여 보고한다.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영어도 꽤 하는 터에 쉽게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보름이상 걸려야 하던 문서작업이나 신원조회 같은 것이 단 몇 분 또는 몇 시간 내에 완벽하게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재능’이 정치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울던 아이도 멈춘다는 쟁쟁한 실권자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정치부장(국가 안전보위부는 부장이 없는 연고로 정치부장이 최고 실권자임)앞에 불리어 가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때부터 막강한 권력자인 정치부장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나의 전도는 양양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따분한 내부지도원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이었다.

북한에는 부장의 아내는 부부장이고 정치부장의 아내는 정치부부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치맛바람이 세다는 말이다. 출세를 하려면 정치위원 보다도 그의 부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유리하였다. 해외에 친척이 있어 집안이 부유했던 나는 정치부장의 부인에게 계기가 있을 때 마다 푼푼하게 돈주머니를 열었다.

마침 정치부장의 둘째 딸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동대원구역에 위치한 ‘소피아’상점에 가서 결혼식용품으로 북한의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30불짜리 진달래표 치마저고리를 부인과 딸에게 각각 한 벌씩, 120불짜리 중국산 천연색텔레비전을 선물했다.

일반사람들은 입어볼 엄두도 낼 수 없는 좋은 옷이어서 부인과 딸은 대단히 만족해했으며 그날 밤으로 정치부장에게 나의 ‘공로’가 보고되었다. 결국 내가 원하면 국가안전보위부 내에서는 어디든 갈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계속)

탈북자 오상민 (2006년 입국)

 

자유북한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