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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고향을 떠난 방랑자의 길을 가고 있다. 두고 온 고향에 잇닿은 습관과 버릇들, 그리고 그 속에 스며있는 추억과 사람들, 이러한 과거를 짊어진 채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방랑자-그것이 현재의 내 모습이다.

 

지금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탈북자임을 먼저 밝히는 나, 이름을 먼저 소개하고 뒤이어 소속이나 가족, 취미 등을 말하는 보통사람들의 인사법과 조금은 비교되지만 이름보다는, 탈북자란 사회적 정의가 나를 설명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름과 성격, 내가 하는 일에 앞서 탈북자란 코드를 먼저 기억해 두고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이렇듯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인 나의 현실은 일상의 혼란과 늘 대립한다.

 

몸도 마음도 다 커버린 어른이지만 새로운 조국인 남한에서는 막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 나만의 방식을 길들이고 그것을 천성으로 알고 살아갈 나이에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삶의 처절한 순응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살아온 반생을 통해 나의 것이라 믿었던 과거의 생각들, 그리고 삶의 방식들과 나는 지금도 부딪히고 있다. 그러한 생각과 관념의 차이를 넘어선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인간은,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갈 명분과 나를 위한 사회의 필요성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고향을 떠나...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생활한지도 벌써 10여년이 되어 온다. 그동안 딱 부러지게 한 일이 없음에도 몇 가지 직함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현재는 특정 대표로 두루 통하지만 이름과 함께 붙어 다니는 직함이 열 개는 더 되는 것 같다. 그 여럿 되는 직함 가운데 꼭 가지고 싶은 것은 막상 빠져있다. 어려서부터 소원했고 은연중, 탈북의 동기로도 작용했던 그 것...

 

나에게 고향은...

 

내가 남한에 온 것은서울에 살고 계신 삼촌들 때문이었다. 14살에 천애 고아가 되었던 나에게 아버지는남조선의 삼촌들과 할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러나 그 유언은 조국이 곧 내 생명이요, 전부라고 믿고 있던 내가, 그것도 군인정신으로 꽁꽁 다져져 있던 내가 그리 쉽게 지킬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유언만큼이나 나의 등을 떠밀었던시인의 꿈, 북한에서도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마음껏 읽고, 쓸 수 있다는 자유의 땅에서 시인의 길을 가고 싶었다. 이런 갈등과 고민 속에서 아버지의 유언은 20년이나 지난 1999년에야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10여년을 살아오면서 삼촌들도 만나보았고, 비록 돌아가셨지만, 해마다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가는 효자가 되었지만 시인으로의 길은 쉽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탈북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때로 고향생각으로 아픈 가슴 쓸어내려야 했던 시인으로의 길...

 

떠나던 나를 위해

아무도 울어준 이 없는 곳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나서 첫걸음 익힌 곳

못다 한 나의 사랑일지 모릅니다.

 

1999 12, 대한민국에 입국한지 꼭 한 달 만에 쓴 시고백의 전문이다. 네 줄 밖에 안 되는 단출한 시지만 누구하나 바래주는 사람도 없이 도망자처럼 고향을 떠나야 했던 당시의 절박함과 속절없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던 시였다.

 

맹목적인 충성경쟁만 난무하던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인생의 반을 허송한 억울함이 아무리 팽배하다 해도 그곳에 나서 첫걸음 익힌 우리들의 고향이 있고, 고향이야말로 죽는 순간까지 가슴에 품고 살 나의 사랑이었더라는 진솔한 고백이었다.

 

추억은 아름다워야 한다.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조사기관에서는 북에서 쓰던 김진이란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중국에서 나를 알던 사람들은 중국에서 사용했던 가명을 썼으며, 남한에 계신 숙부님은 자녀들의 돌림자를 딴, 새 이름을 지워주셨다.

 

인생을 살면서 고비 때마다 달리했던 이름들, 강요된 삶과 불행의 기록이었으며 잊으려 해야 잊혀 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그러한 삶이 탈북자 우리 모두의 삶은 아닌가 싶어 필기장 한구석에 적어 놓았던 아래와 같은 시 구절이 있다.

 

나의 이름을 나도 헛갈리는 때가 있다

삶이 뒤바뀔 때마다 달라져야만 했던 이름이다

개코같던 어린 날의 이름은 누군가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해서

빼앗겨 버렸다, 별로 아깝지 않던 첫 번째 개명은

도망병 시절 추격자의 총구 앞에 와락 던져 버렸다

아무것도 없던 타향시절, 이름만은 가지고 싶어

스스로 지어 불렀던 이름도 있다, 슬펐던 시절의 대명사여서

슬그머니 묻어버린... 그리고는 새 이름으로

새로운 삶과 악수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외로운 골짜기의 지렁이도 바라보지 않던 그 이름들

그래서 늘 하는 생각인데, 막상 이름만큼은 더럽히지 말아야겠다.

 

- <개명>의 전문.

 

나는 시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시 속에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인의 생각이 담겨 있고 인생이 스며 있다고 확신한다. 그 때문에 때론 내가 탈북자임이 자랑스럽기 까지 하다.

 

나는 풍요의 한복판에 산다, 그래서 행복한가?

 

한국에 온지 1년이 지난 2000 10월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에서 쌀을 사먹자는 캠페인이 난무했다. 놀랐다. 쌀이 남을 수 있다니...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야속함마저 치밀어 올랐다. 고향에 두고 온 형제들에게 그 남는다는 쌀 한가마니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1. 가을걷이가 시작되면서 들판은 서서히 몸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받는 것만큼 주기로 한 천년의 약속,

약속의 땅은 인간의 발자취 따라 길게 드러눕는다.

바람이 분다. 눈이 내린다.

 

살붙이처럼 여겨지던 땅도 겨울이 오면 버림을 받는다.

시린 얼음조차 품어야만 했던가.

 

얼어든 가슴 봄 햇살만을 숙원 했더란다.

물속에서의 고통과 자양을 토해내는 긴 여름의 터널을 지나

묵묵한 침묵이 이삭을 선물한다, 눈물 같은 쌀알이다.

 

2. 쌀을 살리자는 사람들이 있다. 밤 낮 외치기만 한다.

죽어 가는 모든 것 위에 유독 쌀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3. 삼일을 우려낸 푸성귀

산짐승이 핥다가만 나무뿌리들

미궁 같은 가마 속에서 한 되의 보리쌀이 버무려진다.

누이의 정조와 맞바꾼 것이다.

 

매운 눈을 비벼가며 저녁연기를 피워 올려라

자식을 굶겨 죽인 아비면 어떠냐.

원수 같은 삶과 억세게 악수하며 죽지만 말자, 죽지만 말자.

밥술을 놓지 못하는 불우한 자들의 삶 앞에서

쌀이 남는 이유를 모르겠다.

 

- <쌀에 대한 이야기> 전문

 

3일을 우려낸 푸성귀, 산짐승이 핥다가만 나무뿌리들과 같은 구절들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목격했던 헐벗은 사람들의 모습과 연관된 시어들이다. 우리들 고향의 쌀 한줌이누이의 정조와 맞바꾼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북한에서의 삶의 처절하고 비인간적이기 까지 한데, 생각하고 돌이켜보기도 힘들만큼 비열하고 치열한 삶이기도 한데...너와 나는, 탈북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고향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처럼 탈북자라는 현실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재의 모습, 오늘의 나를 이끌어왔던 모든 과거와 미래의 꿈은 내 시의 영원한 주제로 남을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산에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민군 전사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는 경비원 노인네 앞에서 머뭇거리는 스물일곱 살의 제대군인입니다. 4 7호를 찾아왔는데요. 세대주 이름이귀뿌리가 빨개진 전사는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섭니다. 고향집은 그가 바친 석삼년의 군복무기간에 모래성처럼 소멸되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고 유년의 웃음과 꿈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스물 세평 적은 집은 얼굴도 모르는 심 아무개의 차지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그래서 고향은 사라졌을까요. 아파트 골목을 빠져 나와 색 바랜 벤치에 앉아 강기슭의 4층집을 멀거니 바라봅니다. 첫 글을 익히던 조그마한 칠판, 그 곁에 놓여있던 댑싸리 빗자루, 위험하리만치 가냘픈 어머니의 허리는 그 집 베란다에 늘 걸려있었습니다.

 

순이야, 순자야, 미숙아, , 진이야그 어머니 만날 듯싶어 산으로 오릅니다. 오르고 내리도록 아무도 없는 고향의 산 모란봉, 푸드덕~ 산 꿩 한 마리가 깃을 치며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 <戰士의 자서전> 전문

 

순진하기만 했던, 군단선전대 작가며 연출가로 오로지 당에 충실하기만 했던인민군 전사는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고향 산기슭의 한 마리 꿩처럼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삶의 둥지를 떠나버렸다. 개인적으로는 불안하고 괴로운 순간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세상에 살면서는 죽어도 깨우칠 수 없었던 자유를 알게 한 소중한 순간이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 소중한 순간들을 시로 적어보았고 아래에 소개한다.

 

폭풍 속, 이유 없는 바람에 흔들리다가

문득 부러진 나무,

만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너의 아픔을

알듯 싶다. 속살을 드러내고 울어야 했던 그 슬픔의 무계

부러져 나간 가지들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지는

흩어져 버리는 몸부림까지.

이제 과거를 믿지 않는 나무는

아픈 몸짓과 떠나 있을 것이다.

 

- <나무>의 전문

 

최근부터 일기쓰기를 다시 한다.

오늘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정리다.

기쁜 날과 슬픈 날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잊음의 훈련이라 믿으며 작은 기억까지 되살려 낸다.

지나온 도망자의 여정과

그 벌판의 눈보라와 삶의 갈급했음과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고 몸부림치던 과거와 싸운다.

이 고통스런 작업이 주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 <일기쓰기>의 전문

 

사람들은 저보고 무슨 무슨 단체장, 혹은 민주화운동가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저는 지금도 시인이고 싶고 앞으로도 시인이기를 원한다. 시는 삶에 대한 고민이고 삶의 고민이야 말로 내 모든 삶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는 내 삶의 보람이다. 삶의 보람이란 다른 말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긍지이기도 하다. 삶에서 긍지를 느낀다는 건 사회의 일원이 되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남한 사회의 적응이란 말, 사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

 

2011 5월 최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