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시기 우리는 장군님 한 사람만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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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했던 엄혹 한 경제난 시기 북한주민들은 배급소 문 닫을 때 언젠가는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었고 농장에서 계획미달이라고 분배 몫 잘릴 때도 다음해는 풍년이 들겠지 기다렷다. 하지만 굳게 닫힌 배급소 문이 가끔가다 열리면 그 앞은 아수라장,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마당이었고 농장의 탈곡 장 마저 분배 타는 날이면 서로 밀치고 닥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배급소 문이 닫히던 90년대 초에 우리 아버지는 장 천공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였다. 병명은위 천공이라고 해서 위부터 갈랐지만 결국은 위는 멀쩡하고 소장에서 터진 자국을 발견하고 수술을 했으나 이미 갈라진 배는 실로 꿰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큰 병도 아닌 것으로 수술대의 실험용이 되고 말았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북한에서도 환자가 나오면 그 가족은 내리막 길을 걸어야 했다. 더욱이 부실한 병원설비와 치료로 우리 집 경제는 살아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 혼수 품으로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싸구려로 시장 통에 내다 팔렸고 가정은 결국은 사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이 되었다.

 

3차에 걸치는 대수술에 아버지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7개월이라는 동안 뒤로 변을 못 보기에 배꼽으로 볼일을 보아야 했던 아버지, 그나마 하루 한 끼 차례지는 밥도 밥이라고 먹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아버지의 변으로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가정의 파산으로 언니 오빠가 한시에 머리가 돌아버렸다. 비록 돌아버린 이유가 정신병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되겠지만 유전으로 볼 때 정신병자 하나 없는 집안에 두 사람의 정신병자가 나온 것을 무엇으로 해석하면 될까?

잊고 살던 지난날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손가락이 떨린다. 정말 중국생활 십여 년에 한국생활 비록 일 년이지만 아직 한번도 가족에게도 내 비치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 때문에 또다시 내 눈에 눈물이 흐른다. 떨리는 이 분노 어디에 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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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와 굶주림은 이제는 우리의 머리 위에 아니,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병마로 고통 하시는 아버지는 의식이 없으니 집안 실정 감감 모른다. 정신 나간 오빠와 언니도 세상이 이제는 녹두 알만하다.

 

농장에 나가서 이렇게 저렇게 구실을 만들어서 아버지 영양을 위하여 찹쌀이며 낙태한 염소새끼며 갖다가 고아드리고 지어는 농촌 지원하는 학생들 식당과 병원을 다니며 국 끓이고 남은 소 뼈다귀를 얻어다가 망치로 때려서 골수를 부수어 그 물을 우려내서 거기에 밥 지어 아버지 대접하고, 아버지는 그런대로 몸은 호전했으나 정신이 돌아간 언니 오빠는 돌아올 수가 없다. 걸핏하면 도끼, , 가위를 쥐고 나하고 아버지한테 달려들기가 일쑤다.

 

돌아가신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이런 꼴로 살라고 나를 낳아서 제대로 키워도 안주고 먼저 갔어요?

 

나의 엄마는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에 가족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너무나 원망스럽다. 아버지와 돌아버린 형제들을 내 어깨 위에 얹어놓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죽고 싶다. 살아서 뭐하냐.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기 싫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또 어쩌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이제는 일이고 머고 다 싫다. 죽이라도 연명하려면 이제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가정의 세대주가 되였던 오빠가 이 꼴이 되고 보니 내 앞으로 다 옮겨왔지만 아버지의 병간호로 일을 못하니 온 가족 분배가 다 잘렸다. 결국은 죽으라는 말 밖에 더 있는가?

하지만 살아야 하겠다.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정신 없는 오빠를 데리고 산에 가서 봄이면 부채마, 삽주, 더덕, 산나물, 도토리 닥치는 대로 캐고 주어 온다. 그래도 하루에 한 끼밖에 차례 질 수 없는 우리 살림이다.

 

정신이 나가기 전에는 착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 놓던 오빠가 정신을 놓으니 일하기를 딱 싫어한다. 몸 쓰기를 싫어한다. 온 하루 도토리 한줌을 줍고는 졸졸 내 뒤만 따라 다닌다. 미칠 지경이다. 지금은 죄스럽지만 차라리 빨리 안 죽는지 싶다.

마대 같은 배낭 하나 가득 채우면 산골짜기에서 해가 넘어간다.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다가 나무가치를 보면 또 주어 와야 한다. 이제는 내가 소녀 가장이 된 것이 실감이 낫다. 오면서 눈물을 씹어 삼킨다.

 

저녁은 뭘 해먹나?

낑낑거리면서 집에 들어서자 썰렁한 집안, 살아있는 온기라고는 느껴도 안 진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도토리 줍다가 곰 발자취를 따라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죄 많은 인간은 살아서 고생하라고 하는지 불 만난 곰이 돌아 치면서 사람을 무지도 죽이건만 나한테는 눈도 안 돌리는 것 같다. 그만치도 값없는 목숨이였든가.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간다. 이 겨울은 어찌 살까? 하지만 겨울이라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눈 속을 헤집고서라도 다람쥐가 먹다 버린 도토리라도 주어야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살찐 부채마는 없어도 야윈 놈이라도 캐와야 한다. 돌 사이를 곡괭이로 파면 언 손 잔등이 짝짝 아려 난다. 피가 샘솟는다. 북방의 날씨도 나를 애를 먹이려고 작정을 했나 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삶이 점점 고달프다. 엄마가 또 원망스럽다. 차라리 멜레(묘 이장)라도 해볼까? 생각을 하니 별로 어려운 거는 아니었다.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엄마의 묘소를 찾아가서 제를 지내고 이장을 서둘렀다.

 

한 마을에 사는 분이 해 주려다가 아파서 드러눕게 되였다. 그런데 이런 일은 미루면 안 된단다. 귀신이 노한다나.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는데 형부라는 사람이 묘를 좀 파 내려가더니 못하겠다고 나앉는다. 그럼 어쩌란 말인고. 할 수 없이 내가 삽을 들고 나섰다. 무덤을 겁도 없이 젖혀댔다.

 

뼈를 꺼내야 하는데 사람이 없다. 몸이 성치 않은 아버지를 안아서 묘안에 들여앉혔다. 그리고 위에서 나는 아버지가오른쪽하면 내가 오른쪽을 받아 외친다. “왼쪽하면 또왼쪽뼈가 잘 발라 안 진다. 나무칼로 살을 뜯으니 잘 안 된다. 장갑 벗어 메치고 칼을 집어 던졌다. 손이 시원히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꼬인 집안이 혹여 풀릴지, 돌아간 엄마 귀신이 노여움이 풀릴지 간절한 소망 안고 끝내고 이장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니 긴 한숨과 추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긴장해서 느끼지 못한 것이 인제야 느껴지는 가부다. , 술밖에 날 달래 줄 것이 없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계절은 흘러서 다음해가 되었다. 정신 없는 오빠를 정신병원에 보냈으나 탈출해서 생강냉이 씹어 먹으면서 집이라고 찾아왔다. 봄이면 계집애가 소나무를 타고 올라서 솔 화분을 채취했다. 그렇게 또 늦은 봄이 왔으나 이제는 나는 기력이 쇠진했다. 몇 년을 앓는 아버지와 정신이 없는 형제를 살리느라고 살 기운이 다 빠졌다.

 

어른들이 그랬던가? 헌 독이 새 독 친다고. 그 찰나에 오빠가 사고를 쳤다. 농장의 소를 잡았다. 감방 감이다. 그때 소 잡고 감옥 가서 죽은 사람이 얼마였든가? 하지만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을 바에야 하고 소도둑이 늘어나는 판에 우리도 소고기나마 배불리 먹어보자. 나도 참을 수가 없다. 다른 짐승은 소리 나서 불편하지만 소라는 물건은 큰 눈을 뒤룩거리며 눈물만 흘리는 거 같다. 하지만, 하지만 나도 살고 싶다.

 

근데 잘되는 놈은 엎어지면 떡 함지에 엎어지고 재수 없는 넘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밤중에 누구도 몰래 한 도둑질이 걸릴 줄이야. 밤중에 뼈를 찍는 소리에 동네 경비가 듣고 신고를 했다. 비록 정신 나간 사람이 끌고 들어온 소지만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소도둑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했든가? 근데 내가 소를 죽였다. 나도 살고 싶다. , 어쩌란 말인가...

안전부 행도 내 몫이다. 취조를 한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살리고 싶다, 나는 죽어도 아버지만큼은 살리고 싶다. 결국 고기 한 점 입에 넣을 수 없는 나인 것을 모두가 인정을 해서 겨우 그 사건이 무마 되었다. 하지만 뒤로 따라다니는 따가운 눈총들, 어쩌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살아야 하기에 얼굴을 들고 산다.

 

죽은 정승이 산개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임금도 사흘만 굶겨 놔봐라. 도둑질 안하나. 내가 도둑이며 농작물 가지고 너네 마음대로 하는 너희는 머냐. 오기로 버티자. 하지만 결국 소 한 마리 때려잡고 돌아온 것은소도둑’. 고기 한 점 입에 넣어보지 못한 아버지와 오빠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허탈하다. 이제는 어찌하고 살까?

 

힘을 놓자. 이제는 순응하자. 그렇게 3, 집은 불하나 안 때고 쌀독은 텅텅 비고 아버지가 난리를 한다. 물이라도 먹어야 산다고... 허 참 웃기지. 물 먹고 오늘 하루 살구 내일은? 눈 감으니 편하다. 이제는 굶주림도 몸에 배인가 부다.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그렇게 또 3.

그나마 소 뼈물 이라도 우려 드셔 그런지 아버지 눈길은 그나마 빛이 있다. 딸년 하나 죽인다고 이웃에 가서 쌀 한 되 얻어 왔다. 죽 끓인다. 일어나서 먹으란다. 오빠 역시 윗방 침대에 누워서 내 자세 그대로 흉내를 낸다. 일어나서 죽 한 모금 입에 넣으니 배가 얼얼해 온다. 윗방을 흘겨보던 아버지 죽 그릇 들고 올라가더니 황급히 소리친다. ?? 하고 일어서보니 한술 떠서 넣어준 죽이 입가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죽 한술도 넘길 힘이 없어진 오빠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어차피 가기로 각오를 한 목숨들이 아닌가.

 

다음날 바로 장례를 했다. 그래도 칠성판에 눕혀놓으니 사람이 있는 거 같아서 실감이 안 난다. 죽은 거 같지를 않다. 무덤을 만들고 비석이 없다. 총각무덤이라서 없단다. ~ 그럼 총각귀신이네.

눈물도 아마 사치인가 부다. 내 눈에는 눈물도 안 난다. 오히려 옆에서는 대성통곡을 해 댄다. 아니꼽다. 너희들 먼데 통곡이야?

 

젯밥으로 올려놓은 이밥 한 그릇, 그걸 보는 아버지의 눈이 빛이 난다. 드리니 누가 먹을세라 뚝딱 해치운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 그나마 정신 없어도 사람이 들어오면 빛이 없는 멀건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던 그 얼굴이 안 보인다. 갑자기 집이 썰렁해진다. 통곡이 나온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온 하루를 울었다. 간 사람이 불쌍한 것보다 살아야 할 앞날이 캄캄하다.

농장에서 쌀 몇키로를 준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한다. 어이가 없다. 한 송장이 나오니 두 송장이 나올까 봐 인제야 쭉정이 강냉이도 차례가 오나 부다.

 

옥수수 속 괭이를 얻어다가 같이 분쇄를 해서 양을 늘려서 끼니에 보탬을 했다. 확실히 죽은 놈만 불쌍타.

오빠 한 사람이 줄어드니 어느 정도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게 부치는 정도가 나아진 거 같다. 하지만 여름이면 극심하게 떠드는 게 하나 있었으니, 김일성의 애도표시로 다문 며칠이라도 농장에 나와서 일하란다. 그럼 내 하루하루 끼니는 당신들이 해 주는가?

 

다음해 봄이 되니 또 기근이 닥쳐온다. 그래도 추운 북방이지만 소 토지라도 하니 겨울 한때는 죽이라도 먹고 사니 그나마 행복이라고 해야 하는가? 보릿고개부터는 마을 곳곳에서 도둑질하다가 살인이 일어나고 목매 자살을 하고 하룻밤만 지나면 온 마을이 뒤숭숭하다. 이 상태로 가면 작년의 그 꼴 못 면한다.

 

아버지한테 중국 가자고 했다. 안 된단다. 겨울에 가자고 한다.

시장 통에 나가서 몰래 선을 놨다. 아버지 몰래 중국 가서 친척 찾아서 돈 얻어 가지고 와야지.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을 떠났다. 집에는 통 강냉이 몇키로와 국수 한 사리 남겨놓고. “아버지 딸이 꼭 돌아올테니 기다려 줘요.” 이말 한마디와...

지금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떠난 걸음이 이제는 십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그 다음해 내 이름 부르고 부르다가 돌아갔다. 이 딸이 아버지한테 쌀밥 배불리 드리겠다고 목숨 걸고 떠났건만 그 약속 지키지도 못한 채 나의 가슴에 빚만 남기고 떠나가셨다. (오빠가 가던 해, 그 달에 언니도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이렇게 나는 졸지에 부모 형제 다 잃고 세상에 내 몸뚱이와 내 그림자만 밟게 된 고아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서 눈물 쥐여 짤 바보는 아니다. 굳이 내가 가슴 아픈 사연 올리는 이유가 있다. 가슴에 고이 묻고 그 누구에게도 헤쳐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과거 내 삶을 내가 이렇게 드러내도 가슴이 후련한 거는 하나도 없다.

 

단지 그 누가 북한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고생이 없었으랴 만 우리의 이 고생이 왜 생겼는지, 내가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서? 나처럼 돌 위에 올려놔도 산다는 사람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효도도 하려고 했지만 세상은 나에게 자식으로써, 동생으로써 앓는 형제를 돌볼 수 없이 각박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와 오빠 언니 네 사람을 내 손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럼 이런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 누구인가? 내가 살인자인가? 아니면 분배 몫을 자른 농장의 간부들인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럼 그게 누구인가? 우리가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던 사회주의와 장군님이 안겨다 준 비극의 종말이다. 차라리 거기서의 종말로 그치면 나는 이 글을 써야 할 의미도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나도 내 부모형제를 저 세상으로, 아니 지옥으로 보내놓고 나 하나 살아보겠다고 자유대한민국으로 찾아왔다. 이제는 역경을 헤치고...

 

 

2008 7 25일 소향